2011년 10월 3일 월요일

바른번역에서 나오면서


2011. 9. 13.

이미 아는 사람도 있을 텐데, 난 얼마 전 바른번역에서 나왔다. 아직 역자 교정을 해야 하는 원고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, 그밖의 일은 정리한 셈. 2004년 겨울을 시작으로 본다면 거의 칠 년을 함께한 바른번역, 그러고 보니 내가 번역가로 일한 기간의 대부분을 바른번역과 함께했군. 그곳에 있으며 많이 성장했고, 그런 기회를 그곳에서 얻을 수 있었기에, 그 시간이 고맙다. 그리고 그런 일을 함께하자고 권해준 대표에게도 고맙고. 그곳에 있는 동안 함께한 번역가들, 직원들, 또 수업에서 만난 수강생들, 다들 내겐 귀한 인연이다. 이제 난 그곳을 떠났지만, 부디 그곳과 관계된 사람들 모두 잘 지내고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기쁜 얼굴로 인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.



내가 그곳을 나온 이유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고, 나도 나름대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몇 자 적어본다. 우선 홍코너(그만둬)부터 소개한다. '그만둬' 선수의 장기는 다음과 같다.



1.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연이 다 되었다는 점이다. 그래, 이것은 이유라기보다는 원인이라고 해야겠지.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 중에는 나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, 중요도와 무관하게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가보자. 우선 그곳에서 내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. 그동안 그곳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을 했지만, 작년 말인가, 그 즈음부터 딱히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기에 이르렀다. 가끔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할 일이 많지 않았다. 한편으로는 편했지만, 한편으로는 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. 할 일이 없는데 굳이 사무실에 나가면 뭘 하나 싶은 날도 늘어났고, 그러다 결국 칠월부터는 재택근무라는 방편을 택하기도 했지만, 결국 그것도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.



2. 바른번역 대표와 워낙 생각하는 게 달랐다. 이것은 이곳에서 상술하지 않으려 한다. 바른번역 대표와 직접 만나서 대화할 기회도 없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혹시라도 편견이 생기는 건 원치 않는다. 생각이 다르다는 건 말 그대로 서로 다르다는 것일 뿐, 누가 옳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. 옳은 길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. 바른번역에 관심 있는 이라면,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주시길 바란다. (바른번역 관계자라면 물론 사정이 다르다. 그들은 대표와 직접 대화할 수 있으므로 내 생각을 이야기해도 된다.)



3. 무엇보다 난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었다.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다. 떠나고 싶을 때 눈치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, 그것이 내게는 예전에도, 지금도 매우 중요하다. 물론 난 작년에도 유럽에 한 달이나 다녀왔고 시시때때로 일찍 퇴근하고 휴가도 편하게 쓰는 편이었기 때문에 일반 직장인과 비교하면 상당히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지만, 여전히 눈치를 봐야 했고 마음이 불편했고 어딘지 떳떳하지 못한, 손에 닿지 않는 뱃속 어딘가가 자꾸 가려운 느낌이었다. 차라리 일 년에 삼십 일은 마음대로 쉬어도 좋다, 이런 규정이 있었다면 그날 만큼은 좀 더 맘 편히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, 이제와 그런 생각도 든다. 여하간 내가 인도 이야기도 꺼내고 했다는 걸 안다면, 이래저래 내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.



4. 동반자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고 싶었다. 이것은 동반자의 바람이기도 했다.




이 외에도 다른 특징이 있겠지만, 이 정도로 하자. 홍코너 '그만둬' 선수를 소개했으니 이제 청코너 '계속해' 선수 차례다. 이번에도 중요도와 무관하게 특징만 적는다.



1. 수강생들이다. 내 수업을 들었고 번역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인데 아직 실력은 안 되고 더 공부해야 하는, 하려고 하는 사람들. 이들에게 난 언제까지나 빚진 마음일 것 같다. 이들이 다 데뷔하기라도 하기 전에는.



2. 번역가들이다. 정확히 말하면 내 수업을 듣고 번역가로 데뷔해 활동하는 사람들. 이들은 그래도 데뷔해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은 덜 되지만 어찌 보면 내가 바른번역에 '끌어들인' 사람들이기에, 나 혼자 자유로이 지내자고 발을 빼는 게 어쩐지 비겁한 건 아닌가 싶었다. 더구나 내가 바른번역에서 나오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'무언의 강요'를 하게 되지는 않을는지도 걱정이었다. (거기 있지 말고 나에게 오세요, 하는.)



3. 현실적인 문제, 즉 돈이었다. 부대표로 있으면서 적지 않은 급여를 받았는데 그것이 '냉무'로 돌아가게 될 테고 더 이상 강의도 하지 않을 테니 강의료도 받지 못한다. 이것을 계산해보면, 어마어마할 정도는 아니어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(??) 정도는 된다. 어쩌면 그동안 난 이런 '안정된 수입원'이 있었기에 출판사에서 책을 맡기겠다고 해도 큰소리 치면서 조건을 높게 부를 수 있었던 게 아닐까(아마 맞을 테지만, 그렇다고 이제 와서 조건을 낮출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, 난 내 조건이 '정당한 대가'라고 믿으니까).




이 외에도 역시 다른 장기들이 있겠지만, 이 정도로 하자. 여하간 이렇게 '그만둬' 선수와 '계속해' 선수가 목숨 걸고 대판 싸운 결과는, 홍코너(그만둬)의 15라운드 판정승이었다. 양 선수 모두 피떡이 되었지만, 승부를 가른 것이 뭔지는 굳이 말하지 않으련다.



바른번역을 나오면서, 대표에게 몇 가지를 약속했다. 그 중 하나는 '번역가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겠다'는 것이었다. 아, 물론, 내가 데리고 나오고 싶어도 날 따라서 나올 사람이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르지만, 그래도 일단 이걸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. 예전에도 바른번역에서 나간 어떤 번역가가 자기에게 배운 사람들을 몇 명 데리고 간 듯 보이는(?) 일이 있었는데,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. 내가 바른번역 내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, 어쩐지 수강생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. 더구나 처음 바른번역을 나오려고 할 때는 나도 나와서 뭔가를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(그게 뭐가 될는지는 모르지만) 일단 그 점을 못박아둘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. 사실 지금에 와서는 나도 굳이 뭘 해야 하나 싶기는 한데 말이지... 어쨌거나 내가 먼저 말을 건네서 나에게 오라고 하는 일 없을 거라고 약속했고, 누군가 내가 나간 걸 알고 연락해오더라도 내게 오라고 설득하거나 하지 않겠다고도 말했다. 온다고 해도 줄 것도 없고, 푸흡. 그런데도 그곳에서 나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, 그것까진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. 그런 사람은 아마 나 때문에 나오는 건 아닐 거다.



바른번역에 있으면서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알게 된 게 하나 있다. 나 자신에 관해서. 난 내가 그렇게 보좌하는 자리에 있는 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. 대표 자리는 귀찮기도 하고, 굳이 나서고 싶지도 않고, 딱히 권력욕 같은 게 있지도 않으니까. 알고 보니 나는 내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무척 답답해하는, 한마디로 제멋대로인 놈이었던 것 같다. 난 그런 자리보다는 차라리 최종 결정을 내리는 대표 자리가 낫다. 아니, 그보다도 그냥 내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맞는다. 용의 꼬리보다는 지렁이 머리인 걸까? 그건 알 수 없지만, '자리'란 건 뭐가 되었든 성가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. 내가 앞으로 뭔가를 만든다면, 애초에 내가 없이도 잘 굴러갈 수 있는 모임으로 꾸릴 셈이다.



덧. 바른번역에서 내 강의를 들으려고 벼르던 분들에게는 참으로 죄송스럽다. 그래도 굳이 내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따로 말씀해주시길. 힘 닿는 대로 도울 생각이니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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